‘나’를 알기 싫은데

2011. 8. 17. 14:55푯말의 대화

사람들이야 궁금하니 묻겠지만, 똑같은 질문을 몇 십 번씩, 몇 백 번씩, 심지어 몇 천 번씩 받으면 ‘참 지겹다’ 생각이 저절로 든다.

그런데 그보다 더 지겨운 것은, 같은 내용의 답을 몇 십 번씩, 몇 백 번씩, 심지어 몇 천 번씩이나 반복하는 것인데, 그렇다고 ‘나(我)’를 아는 방법을 가르친다면서 대답하지 않을 수도 없고.

그래서 아예, 여러 해 동안 ‘나는 누구지?’ 고민하는, ‘나를 알고 싶다’ 말하는 수 만 명의 사람들과 대화한 것들을 최대한 순화하여 질문의 유형별로 정리했다.

그것도 그저 평범하게 대화했던 것이 아니라, 심지어 자식 같은 연놈들에게까지 온갖 험악한 소리를 들어가면서 나누었던 대화 아닌 대화들까지 포함하여.

Q : 저는 제 본래의 모습을 알기 싫어요. 왜냐하면, 막상 알고 보니, ‘본래의 나’는 안 좋은 사람일 수도 있으니까요. 또, 제가 싫어하는 모습일 수도 있겠죠. 혹은, ‘지금의 나’보다 훨씬 못한 사람일 수도 있고. 그렇다보니 가끔은 ‘과연 나는 누구일까?’ 생각할 때도 있지만, 그냥 모른 척, 금방 그런 생각 자체를 외면해버리죠.

나는 ‘반드시 본래의 나를 알아야한다’ 말한 적이 없는데, 왜 그런 말씀을 하시나요? 혹시, 누구인가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고 강요하던가요?

Q : 아니요, 그저 제 생각을 이야기한 것뿐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말하든지 관심 갖지 말고, 그저 편한 대로 하세요. 그런 두려움을 갖고 있으면서 억지로 자신을 알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도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으니. 몸에 좋은 약도 억지로 먹으면 독이 될 수 있다는데, 좋은지 나쁜지도 모르는 ‘본래의 나’를 알기 위하여 억지로 노력할 필요는 없죠.

Q : 그런데도 가끔은 불쑥불쑥 ‘나를 알고 싶다’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옷을 살 때면 누구나 자기에게 가장 잘 맞는 옷을 고르듯이, 사람은 자기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자리로 돌아가려는 무의식적인 본능을 갖고 있습니다. 바로 이 본능 때문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더구나 정작 스스로는 전혀 원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고 이해하면 될 듯싶군요.

Q : 그럼 ‘본래의 나’가 저한테 ‘가장 잘 어울리는 자리’라는 말씀인가요?

그렇습니다. 그것은 어떤 경우에도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죠. 또,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결코 그렇게 할 수 없고요.

Q : 이해가 안 되는군요. ‘본래의 나’가 저한테 가장 잘 어울리는 자리라면 왜 제가 제 본래의 모습을 아는 것에 두려움을 느낄까요?

처음에 ‘본래의 나’가 좋지 않은 사람일 수도 있으며, 또, ‘지금의 나’보다 못한 사람일 수도 있어서 자신을 알아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느낀다고 말했잖아요? 그런데 그 근본적인 이유는 ‘본래의 나’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 정확한 정보를 알았다면 열심히 자신을 알기 위하여 노력했겠죠.

Q : 알고 보니 제 본래의 모습이 유영철 같은 연쇄살인범이라고 해도요?

그렇습니다. 그뿐 아니라, 자신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알게 될수록 그만큼 더 많이 자신을 사랑하게 되죠. 비록, ‘본래의 나’가 연쇄살인범보다 훨씬 더 끔찍한, 더할 수 없이 악독한 범죄자라고 해도 말입니다.

Q: 한 가지만 더 물어볼게요. ‘본래의 나’가 점쟁이들이 말하는 ‘운명’과 같은가요?

물론, 그렇게 말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본래의 나’와 ‘운명’은 무조건 같다고 생각하면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하지만 전혀 다르다고 말해도 또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기게 되니 어떻게 말해야할지 모르겠군요.

Q : 어떤 문제가 생기는데요?

우선, 무당들이나 점쟁이들이 걸핏하면 운명이 어떻다느니 말하지만, 그중에는 자신의 운명조차 알고 있는 사람이 단 한명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열심히 다른 사람들의 운명을 말해주고 있는데, 이런 형편이니 그런 사람들이 떠들어대는 ‘운명’과 ‘본래의 나’가 어떻게 같다고 말할 수 있겠어요?

Q : 무당들이나 점쟁이들 중에 자신의 ‘운명’도 아는 사람이 없다니요?

‘본래의 나’를 알면 더 이상 그런 짓은 안하거든요. 따라서 무당이나 점쟁이를 하고 있다는 자체가 바로 아직까지 자신의 정확한 ‘운명’조차, 즉, 자신의 본래의 모습을 모르고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죠. 따라서 그런 사람들이 말하는 ‘운명’이 ‘본래의 나’와 무조건 같을 수는 없는 것이고요.

Q : ‘본래의 나’를 알게 되면 더 이상 무당이나 점쟁이를 안 한다? 어떻게 그렇게 잘라서 말씀하실 수 있죠?

그것까지 다 설명하기는 곤란합니다. 왜냐하면, 제 능력으로 충분히 이해하게 설명하려면 최소한 1년 이상 걸려야할 것 같거든요. 하지만 내가 말하지 않아도, 자신에 대하여 알게 된다면 그만큼씩 그 이유를 직접 깨달아 알게 될 겁니다.

Q : 경험자만이 알 수 있다는 말씀인가요? 그렇다면 그 부분은 그냥 넘어가죠 뭐. 그런데 ‘운명’과 ‘본래의 나’가 다르다고 말하면 어떤 문제가 생기죠?

실제로 사람들이 어떤 의미로 사용하고 있든지 상관없이, 그 기본적인 의미는 같으니 ‘운명’과 ‘본래의 나’가 서로 다르다고 말한다면 또 문제가 생기는 것이죠.

그래서 같다고도, 혹은, 다르다고도 말하기 어려운 것이고요.

Q : 네에. 아무튼, 그렇다면 ‘나’를 알아가는 것은 제 ‘운명’을 알아가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군요?

그렇죠.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하는가?’라는 의문에 대한 답을 그 ‘운명’을 알아야만, 즉, ‘본래의 나’를 알아야만 제대로 구할 수 있으니까요. 또,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먼저 ‘나’가 누구인지 알아야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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