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아주기

2014. 4. 11. 11:06세상 속 이야기/푯말 이야기

대략 일곱, 여덟 살 정도의 어느 날.

집에 있는데 동갑짜리 한 아이가 급한 목소리로 나를 찾았다.

빨리 나와 봐!”

그래서 무슨 일인가 나갔더니, 그 아이는 난데없이 우리를 괴롭히던 악당에 대한 욕을 하라고 재촉하기 시작했다.

, 걔 싫어하잖아. 그러니 빨리 욕해봐.”

하지만 생각할 틈조차 없이 계속되는 그의 재촉에 얘가 갑자기 왜 이러지?’ 생각하며 그냥 멍하니 서있었는데, 그러자 갑갑했던지 그 아이는 먼저 그 악당에 대한 욕을 잔뜩 늘어놓기 시작했다.

너도 이렇게 해봐.”라면서.

그러나 평소에 그 아이가 간사한 면이 있던 터라 쉽게 그 말대로 할 수는 없었다.

그러다가 무엇인가 찜찜하면서도 얘가 먼저 욕을 했으니 나도 해도 되겠지생각하며 못 이기는 척 악당에 대한 욕을 딱 한마디 했는데, 그랬더니 기다렸다는 듯 그는 곧 어디로인가 사라졌다.

, 잠깐 여기서 기다려라는 말만 남겨놓고.

그리고는 잠시 뒤, 어디에서인가 그 악당이 눈을 부라리며 갑자기 튀어나왔다.

, 내 욕했다면서?” 소리를 지르면서.

그 새끼한테 속았구나.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먼저 고자질을 하는 건데.’

그날, 나는 뒤에서 남의 욕이나 하고 다니는 나쁜 놈으로 몰려 곤욕을 치렀는데, 그 뒤에도 몇 차례 더 비슷한 경험하면서 내 속을 쉽게 드러냈다가는 죽을 수도 있다생각하게 되었고, 이 때문에 더욱 내 속을 드러내지 않게 됐다.

알아도 모르는 척, 들었어도 못 들은 척, 봤어도 못 본 척하면서.

그런데 어느 정도 자라면서 보니, 사람들은 자신에게 속아주는 사람한테 더 쉽게 자신의 속을 드러냈다.

처음에는 아주 그럴 듯하게 말하다가도 상대방이 속는 듯싶으면 마음 놓고 점점 더 심한 거짓말을 늘어놓거나 속이려는 자신의 의도를 쉽게 드러내는 등으로.

이런 사실을 알고부터 그 속을 알고 싶을 때면 오히려 일부러 속아주기도 했는데, 그러다보니 때로는 나를 속이려는 사람들을 오히려 역이용할 수도 있었다.

누구인가의 말대로 속는 놈이 바보지, 속이는 놈이 바보냐?’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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