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로부터의 자유

2011. 8. 23. 16:39푯말의 대화

사람들이야 궁금하니 묻겠지만, 똑같은 질문을 몇 십 번씩, 몇 백 번씩, 심지어 몇 천 번씩 받으면 ‘참 지겹다’ 생각이 저절로 든다.

그런데 그보다 더 지겨운 것은, 같은 내용의 답을 몇 십 번씩, 몇 백 번씩, 심지어 몇 천 번씩이나 반복하는 것인데, 그렇다고 ‘나(我)’를 아는 방법을 가르친다면서 대답하지 않을 수도 없고.

그래서 아예, 여러 해 동안 ‘나는 누구지?’ 고민하는, ‘나를 알고 싶다’ 말하는 수 만 명의 사람들과 대화한 것들을 최대한 순화하여 질문의 유형별로 정리했다.

그것도 그저 평범하게 대화했던 것이 아니라, 심지어 자식 같은 연놈들에게까지 온갖 험악한 소리를 들어가면서 나누었던 대화 아닌 대화들까지 포함하여.

Q : 저는 그동안, 정말이지 엉망진창으로 살았습니다. 제게는 아무런 희망도 없는 듯싶어서 닥치는 대로 마구 살아왔는데, ‘한번 밖에 없는 인생이건만, 그냥 이렇게 살아가도 될까?’ 가끔 후회도 되더군요. 하지만 조금만 지나면 언제 그런 생각을 한 적이나 있었냐는 듯이 또 똑같이, 그저 닥치는 대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럼 이제부터는 자신을 알기 위하여 열심히 노력하십시오. 지금까지의 삶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그뿐이니까요.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셀 수 없이 많은 돈을 벌게 되었다고 해도, 엄청난 권력을 갖게 된다고 해도, 또, 대단한 명예를 얻게 되었다고 해도 결코 지금의 삶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Q : 제 자신을 알면 어떻게 되기에 그렇게 말씀하시나요?

그동안 어떻게 살았던지 상관없이, 일단 ‘나’를 알게 되면 그동안의 삶은 그 준비과정으로, 즉, ‘나’를 알기 위하여 노력하는 과정에서 누구나 겪는 시행착오로 바뀌게 됩니다. 그렇다보니 매우 부끄럽고 어떻게든 감추고 싶은 삶이라고 해도, 건물의 기초석처럼, 아주 의미 있는 삶으로, 매우 중요한 과정으로 바뀌게 되죠.

Q : 할 수만 있다면 이제까지의 삶을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워버리고 싶은데요.

많은 사람들이 그동안의 삶이 부끄럽다며 그렇게 말하는데, 사람의 주변에는 이제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자세하게 알고 있는 증인들이 여럿 있답니다. 그래서 아무리 ‘나는 기억나지 않는다’ 외쳐도, 그 증인들이 각자 알고 있는 온갖 증거를 들이대면서 그 과거를 증언하죠. 그러니 누가 어떻게 과거를 잊을 수 있겠어요?

Q : 그렇다면 그 증인들이 한명도 없는 곳으로 떠나면 되겠군요.

매우 그럴 듯한 생각이군요. 사실, 그런 생각 때문에 어디로인가 멀리 떠나는 사람들도 여럿 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현재란 늘 과거의 연장선상에 있답니다. 또, 미래는 현재의 연상선상에 있죠. 따라서 사람은 어떤 노력을 해도 결코 과거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데, 단지 눈에 보이는 증인이나 증거가 없다고 해서 사람이 과거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더구나 ‘나’도 그 증인이고, 또, 증거인데?

Q : 말씀이 좀 어렵네요.

아무리 노력해도 사람은 결코 과거에서 벗어나거나 잊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어떤 노력을 해도, 이미 과거의 기억은 잠재의식으로 남아있으니,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겠어요? 그뿐 아니라, 그 증인이나 증거는 계속 남아있는 까닭에, 사람은 죽은 뒤에도 결코 그 과거에서, 이제까지의 삶에서 자유롭게 될 수 없답니다.

Q : 무서운 말씀을 하시네요.

더구나 사람의 ‘그동안의 삶’이란 아주 중요한 의미와 가치를 갖고 있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오직 ‘나’를 알아야 제대로 알 수 있는데, 그러나 그렇지 못하다면 과거는, 이제까지의 삶은 계속해서 사람의 발목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을 겁니다.

Q : 제 과거가 제게 중요한 의미와 가치가 있다고요?

에디슨은 어린 시절에 어미닭처럼 달걀을 품었다고 하는데,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런 행동이 그저 ‘미친 짓’으로만 보였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시행착오를 겪는 과정이 있었기에 결국 전구나 축음기 등을 발명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에디슨은 그렇게 시행착오를 겪은 과정을, 즉, 자기의 이제까지의 삶을 마냥 부끄러워했을까요? 혹은, 자신의 과거를 어떻게든지 잊어버리고 싶었을까요?

Q : 그렇지는 않았겠죠.

어린 에디슨을 미쳤다면서 손가락질하던 사람들 중에도 그 발명품들을 보고 ‘저런 것들을 발명하기 위하여 어린 시절에 그런 행동을 했구나.’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을 듯싶은데, 현재는 과거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말한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즉, 과거란 현재를 위한, 또, 미래를 위한 밑거름이 된다는 말이지요.

Q : 그럼 이제까지 어떻게 살았든지 상관없이, ‘끝이 좋으면 다 좋다’라는 말처럼, 앞으로 제가 잘 되면 그동안 엉망으로 살았던 것은 다 덮어지겠군요?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자신을 알기 위해서 노력하라고 말한 것이고요.

Q : 그렇다면 꼭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잖아요? 돈을 많이 벌거나, 국회의원이 되도, 혹은, 이제부터 공부를 열심히 하여 사법고시에 합격해도 저는 결국 과거에서 자유롭게 될 수 있잖아요? 또, 그 밖의 다른 방법도 있을 수 있을 것이고요.

맞습니다. 그런데 과거에 몸을 팔던 여자가 어느 날부터인가 사업을 시작해서 많은 돈을 벌게 되었다면 그 주변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 것 같습니까? 순수하게 ‘저 여자는 사업을 해서 돈을 많이 벌었다’ 생각할 것 같습니까?

Q : 글쎄요? 뭐라고 생각하는데요?

앞에서는 그렇지 않겠지만, 뒤돌아서면 손가락질하며 ‘저 여자는 몸을 팔아서 저렇게 되었다’ 말합니다. 그 밖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과거에서 자유로워진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것 같습니까? 그렇다면 고민할 필요도, 이유도 없죠. 그렇다면 굳이 자신을 알기 위하여 노력하라고 말할 필요나 이유도 없을 것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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