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늘 여기에 있건만

2011. 8. 19. 17:09푯말의 대화

40살이 되어 새로 영어공부를 시작했다는, 정신병원 의료진 한 사람이 찾아왔다

Q : 역시, 공부는 어릴 때 해야겠어요. 나이를 먹은 뒤에 하려니까 참 힘드네요.

직업으로 봐서는 굳이 힘들게 영어공부를 할 필요는 없을 듯싶은데, 이제 와서 다시 영어공부를 시작하게 된 이유라도 있나요? 더구나 몹시 바쁘잖아요?

Q : 미국에 가려고요.

아, 유학을 가려나보군요. 아니면, 이민을 가려고 그러시나?

Q : 그게 아니라, 저를 찾아서 미국에 가려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미루어왔는데, 더 이상 미루었다가는 안 될 듯싶어서, 이렇게 힘들게 영어공부를 하고 있는 거죠.

‘나’를 찾으러 미국에 간다? 말이 되나 모르겠네요. 한국에서도 못 찾은 ‘나’를 미국에 간다고 과연 찾을 수 있을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쉽지 않을 듯싶은데.

Q : 왜요? 미국에 가면 ‘나’를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하시나보죠?

대답하기 전에 먼저 질문을 하나 할게요. 혹시, 이제까지 진지하게 ‘나’가 과연 어디에 있을지 생각했던 적이 있나요? 혹은, 누구인가에게 진지하게 ‘어디에 가면 나를 찾을 수 있을까요?’ 물었던 적은 있나요? 그런 것도 아니라면, ‘미국에 가면 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생각하게 된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Q : 글쎄요? 기억이 잘 안 나는군요.

그렇게 막연하게 생각하면서도, 그렇게 준비가 허술한데도 과연 ‘나’를 찾을 수 있을까요? 미국이 아니라 달나라에 간다고 해도 어렵지 않겠어요? 찾는 것이 어디에 있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어도 찾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한데.

Q : 마음이 간절하면 이루어질 수도 있겠죠?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하잖아요.

그런 말은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한테나 하십시오. 내가 사람들에게 ‘나’를 찾는 방법을 가르치는 사람인데, 그런 얕은 말이 통할 것 같습니까? 그렇게 준비를 어수룩하게 했다가는 보나마나 실패할 것이니, 처음부터 다시 준비하세요.

Q : 그래요? 그럼 제가 자신을 찾는 데 어떤 도움을 주실 수 있을까요?

자주는 아니라고 해도, 거울을 볼 때가 분명히 있을 겁니다. 과연 그 거울에는 누가 비취던가요? 거울에는 도대체 어떤 사람의 모습이 반사되어 있던가요?

Q : 당연히 저죠.

그렇게 ‘나’는 늘 거울 앞에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거울 앞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는 늘 여기에 있죠. 그런 ‘나’는 버려두고 왜 미국에 가려고 하죠?

Q : 과연, 거울에 비친 ‘나’가 ‘진정한 나’일까요? 혹시, ‘나’의 허상은 아닐까요?

정신병원에서 일하신다니, 어린 시절부터 상처를 많이 받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자기부정’과 ‘현실부정’을 매우 잘 한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겁니다. 그런데 거울에 비친 자신을 ‘진짜 나일까?’ 의심하는 것은 ‘자기부정’, ‘현실부정’ 같지 않아요?

Q :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이런, 정신병원에서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 정신병동에 갇혀있는 사람인가보네. 예전에 어떤 임상심리사라는 미치광이가 거울에 비친 모습을 ‘왜곡된 상’이니 어쩌니 떠들던데, 혹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Q : 모르겠어요. 그럼 제가 왜 ‘나’를 찾으러 미국으로 간다고 말하는 것 같아요?

어린 시절부터 그 부모를 비롯한 가족에게 많은 상처를 받았던 사람들 중에는, 집에 대한 도피욕구가 생긴 까닭에, 밖으로 쏘다니는 것을 좋아하게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매우 여러 가지 유형이 있는데, 그중에는 자기의 부모를 비롯한 가족이 있는 한국에 있기 싫다면서 아예 다른 나라로 가는 사람들도 있죠.

Q : 그런데요?

그런데 그중에는 외국에 가는 이유를 ‘나를 찾으러’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게 있습니다. 혹시 자신이 그런 경우에 해당되는 것 같지 않습니까?

Q : 뭐, 그럴 수도 있겠군요.

그렇게 막연하게 말할 것은 아닌 듯싶은데요. 정신병원에 근무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나 생각해봐야 하는 것 아니에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사람이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말하면서도, 정작 그 이유를 생각하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지 않아요?

Q : 그럼 이번 기회에 한번 생각해보죠. 그런데 도피욕구라는 것은 뭔가요?

무엇인가 문제가 생기면 해결할 생각은 하지 않고, 무작정 도망치는 증상으로, 그저 습관으로만 생각하는 까닭에 병리학적으로는 취급할 수도 없고, 또, 아직 그 존재조차 모르는 정신문제의 여러 가지 유형들 중에서 한가지이죠.

Q : 그러니까 제게 그런 도피욕구가 있다는 말씀이죠?

나한테 물어보지만 말고, 이번 기회에 스스로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내가 아무리 자세히 설명해도, 거울에 비친 자신을 ‘허상’이라고 부정하는 것처럼, 계속해서 아니라고 부정한다면 내 설명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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