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엇인가?

2011. 8. 16. 11:50푯말의 대화

사람들이야 궁금하니 묻겠지만, 똑같은 질문을 몇 십 번씩, 몇 백 번씩, 심지어 몇 천 번씩 받으면 ‘참 지겹다’ 생각이 저절로 든다.

그런데 그보다 더 지겨운 것은, 같은 내용의 답을 몇 십 번씩, 몇 백 번씩, 심지어 몇 천 번씩이나 반복하는 것인데, 그렇다고 ‘나(我)’를 아는 방법을 가르친다면서 대답하지 않을 수도 없고.

그래서 아예, 여러 해 동안 ‘나는 누구지?’ 고민하는, ‘나를 알고 싶다’ 말하는 수 만 명의 사람들과 대화한 것들을 최대한 순화하여 질문의 유형별로 정리했다.

그것도 그저 평범하게 대화했던 것이 아니라, 심지어 자식 같은 연놈들에게까지 온갖 험악한 소리를 들어가면서 나누었던 대화 아닌 대화들까지 포함하여.

Q : 푯말님은 ‘나’를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나’를 어떻게 정의하고 있느냐는 질문인가요?

무엇인가 오해하고 계시는데, 그 정확한 의미도 이미 매우 오래전부터 있었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죠.

그런데도 ‘나’에 대하여 새롭게 정의할 필요가 있을까요?

저는 그런 멍청한 짓은 하지 않습니다. 있는 것을 제대로 담기도 힘들건만 뭐하려 그렇게 하겠어요?

Q : 이미 ‘나’의 정확한 의미를 아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요?

그럼요. 물론, 과거에는 정보의 전달이 쉽지 않았으니 지금처럼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아무튼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그 정확한 의미를 알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나’를 알아가는 과정은, 새롭게 ‘나’를 정의하는 과정이 아니라, 이미 있던 것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도 말할 수 있죠.

Q : 네에. 그런데 왜 저는 그 의미를 모를까요?

또 같은 말을 해야 할 듯싶은데, 분명히 알고 있지만, 다른 사람들처럼 ‘이것은 답이 아니다’ 생각했던 까닭에 ‘나는 아직 모른다’ 착각하고 있는 듯싶군요.

물론, 이제까지 다른 사람들과의 교류가 전혀 없었다면 아직 모르고 있을 수도 있지만.

Q : 그래요?

그렇습니다. 그러니 있는 것도 알아보지 못하면서 새삼스럽게 ‘나’를 정의하고, 또, 그렇게 되기 위하여 노력하기보다는, 이미 있는 그 의미를 온전하게 알아보기 위하여,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안에 담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이 훨씬 현명하겠죠?

Q : 물론, 이미 있었다는 사람의 의미가 정확하다면 푯말님의 말씀도 정확하겠죠.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아무 것도 없지 않습니까?

뉴턴은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을 발견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그 이전에는 사과가 결코 나무에서 떨어지지 않았을까요? 결코 아니죠.

그 이전에도 분명히 사과는 계속해서 떨어졌지만, 사람들은 그런 것을 무시했죠.

하지만 뉴턴은 그렇게 하지 않았기에 ‘만유인력’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인데, 이와 같이, 익숙함 때문에 그 근거조차 무시해서 그렇게 생각하게 된 것은 아닐까요?

Q : 음.

‘나’의 의미가 분명하게 있는데, 어떻게 그 근거가 존재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그 근거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더구나 다른 것도 아닌, 다른 사람들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 그 명확한 근거들 중 하나이죠. 그러니 그런 생각은 그만 하십시오.

Q : ‘나’의 명확한 의미뿐 아니라, 그 명확한 근거까지 이미 존재하고 있다?

과학자들이 툭하면, ‘새로운 사실을 밝혀냈다’ 떠들어대지만, 실제로 그런 것은 단 한 가지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모두는 오래전부터 이미 있던 것들이니까요.

더구나 오직 사람들만 모르고 있었을 수도 있는데, 따라서 과학자들의 말은, ‘아직 사람이 모르고 있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라고 이해하는 것이 훨씬 더 정확하겠죠.

Q : 그렇죠.

또, 어떤 사람들은 ‘이제까지 없던, 전혀 새로운 것을 발명했다’ 말하지만, 그런 것들도 역시, 실제로 알고 보면, 이미 이 세상에 있던 여러 가지를 조합해서 만든 것들에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 근거조차 찾을 수 없던, 완전히 새로운 무엇인가를 만들어냈다는 듯이 큰소리치고 있죠.

Q : 음.

따라서 사람이 하는 모든 발견이란 이미 오래전부터 이 세상에 있어온 것들을 새롭게 깨닫는 것이요, 사람이 하는 모든 발명이란 그 발견을 활용하는 것뿐인데, ‘나’의 의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있던, 즉, 본래부터 있던 그 의미를 재발견하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고, 또, 내 속에 담으려고 노력하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죠. 그것이 바로 ‘나’를 알고, 또, 찾아가는 과정인 것이고요.

Q : 공자가 말한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인가요?

제가 무식한 까닭에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찾아내겠다면서 큰소리치던 물리학자 등의 과학자들이 결국은 계속해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는 것처럼, 실제로 사람이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결국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Q : 그렇다면 새로운 것은 결국 사람이 아직 모르는 것이라는 말이 되겠군요?

맞습니다. 그뿐 아니라, 비록 알고 있다고 해도 아직 그 정확한 이치를 깨닫지 못한 것들도 사람이 앞으로 발견하게 될, 또, 발명하게 될 새로운 것이 되겠죠.

Q : 네에.

이런 여러 이유로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란 그동안 몰랐던 사실들을 계속해서 깨달아 알아가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그 알아가는 재미가 말로는 도무지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정말 엄청납니다. 아무리 재미있는 게임이라고 해도, 혹은, 중독성이 강한 마약이라고 해도 결코 그 재미를 대신할 수는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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