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에 관한 이야기

2011. 8. 20. 00:39푯말의 대화

몇 년 전, 자신은 어문학을 전공한다고 소개한 어떤 대학생이 여러 날 찾아왔다

Q: 전공 때문에도 많은 책을 읽어야하지만, 아무튼 책을 많이 읽는 제가 무척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왜 푯말님은 그런 제가 문제가 있다는 듯 말씀하시나요?

더구나 다른 사람들은 모두 책을 많이 읽으면 좋다고 말하잖아요?

밥을 많이 먹으면 무조건 몸이 건강해질까요? 아니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저 살만 찔 뿐이죠. 밥을 먹은 뒤에는 적당한 운동을 해야 몸이 건강해지는데, 독서도 이와 마찬가지랍니다. 그래서 무조건 책을 많이 읽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책을 읽은 뒤에는 그것을 충분히 소화해야만 비로소 머리가 건강하게 된답니다.

Q : 그럼 책을 많이 읽으면 머리가 건강하게 되지 않는다는 말씀인가요?

이제까지 책을 많이 읽었다는 사람을 꽤 여러 명 만나봤어요. 그중에는 심지어 하루에 두세 권의 책을 읽는다는 사람도 있었는데, 말할 때마다 책에서 읽은 것을 기가 막힐 정도로 잘 인용했지만, 모두들 공통적인 문제점을 갖고 있더군요.

Q : 어떤 거죠?

적절하지 않은 말을 인용할 때도 가끔씩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그 사람들에게 ‘그 작자가 왜 그렇게 말했는지 아느냐?’ 질문했더니, ‘나는 그런 것은 아예 생각하지 않는다’, 혹은, ‘머리 아프게 왜 그런 생각을 하느냐?’ 등으로 대답하더군요. 분명히 어떤 이유가 있으니 그 작자들이 그런 말을 한 것일 텐데, 그렇게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무턱대고 책을 많이 읽어서야 머리가 건강해질 수 있겠어요?

Q : 음.

그래서 그 문제점을 지적하니, ‘그 의미를 생각하지 않는 것이 나의 치명적인 약점이다’ 인정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렇게 그 정확한 의미도 모르는 말을 아무 때나 인용해서야 ‘앵무새’, 혹은, ‘녹음기’ 이상의 대우를 받을 수 있을까요?

Q : 하지만 책을 많이 읽는다고 해서 그 의미를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럼 학생은 그동안 읽었던 책들의 내용을 얼마나 곱씹어봤나요? 10% 정도는 확실하게 곱씹어봤나요? 아니, 대략 5% 정도는 그렇게 했던 것 같아요?

Q : 글쎄요? 잘 기억이 나지 않는군요.

소화하는데 초점을 맞춘다면 결코 많은 책들을 읽을 수가 없답니다. 한 달이나 걸려야지 모두 소화할 수 있는 책들도 많이 있고, 심지어 몇 달, 혹은, 몇 년이나 걸려야지 겨우 소화할 수 있는 책들도 결코 적지 않게 있으니까요.

Q : 그렇지 않아도 고민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책을 많이 읽다보니 내 머릿속에는 그만큼 더 많이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들어차는 반면, 내 생각은 점점 줄더군요.

그런 것이 다독 때문에 생기는 가장 대표적인 문제점이죠. 그런 것도 생각하지 않고 TV를 비롯한 각종 보도매체들에서는 무조건 책을 많이 읽으면 좋다는 듯이 떠들어대고 있는데, 그렇게 하다가는 결국 책을 쓴 사람들의 노예가 될 뿐입니다.

즉, 내 안에 정작 나는 없고, 온통 다른 사람들만 들어차게 되는 것이죠.

Q :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저는 전공 때문에 책을 안 읽을 수도 없는데요.

이미 말했듯이, 그 내용을 곱씹어봐야죠. 도대체 그 작자가 어떤 생각을 갖고 그 책을 썼는지 생각하고, 조금이라도 기억에 남는 구절이 있으면, 또 그 구절은 어떤 의도를 갖고 그렇게 썼는지 충분히 생각해야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그 저자의 생각이 온전하게 내 것으로 변하여 고스란히 머릿속에 쌓이게 되죠.

Q : 네에.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많은 책을 읽을 수는 없잖아요.

처음에는 당연히 그렇겠죠.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이 일단 몸에 배면 얼마든지 많은 책을 읽으면서도 그 작자의 생각까지 모두 알 수 있답니다. 왜냐하면, 언뜻 생각하기에는 모든 작자들이 모두 다른 의도로 글을 쓴 듯싶지만, 실제로는 같은 의도를 그 나름대로의 표현으로 달리 쓴 책들도 엄청나게 많이 있거든요.

Q : 그래요?

똑같은 사물을 똑같은 각도에서 봤어도 사람마다 느끼는 점은 각기 다릅니다. 그렇다보니 그 표현도 그만큼 차이가 생기게 되는데, 책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그 포장만, 즉, 표현만 차이가 있을 뿐, 실제로는 그 알맹이가 같은 책들이 엄청나게 많은데, 이런 까닭에 한 권의 책을 제대로 소화하면 그와 같은 알맹이의 책들은, 즉, 같은 의도로 쓰인 책들은 쉽게, 또, 많이 읽을 수 있는 것이죠.

Q : 무슨 말씀인지는 대략 알겠는데, 그런 책들이 과연 얼마나 많겠어요?

결국 책의 내용은 그 저자가 자신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에 따라서 결정됩니다.

사물이나 사건, 혹은, 사람을 보는 관점이 ‘나’를 얼마나 알게 되었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까닭인데, 매우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알고 있는 정도가 거의 비슷해요. 그러니 실제로는 엄청나게 많은 책들이 비슷한 수준에서 쓰여 있죠.

Q : 그래요?

그러니 아무런 염려하지 말고, 이제부터는 책을 곱씹으면서 읽어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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