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2011. 8. 20. 13:06푯말의 대화

사람들이야 궁금하니 묻겠지만, 똑같은 질문을 몇 십 번씩, 몇 백 번씩, 심지어 몇 천 번씩 받으면 ‘참 지겹다’ 생각이 저절로 든다.

그런데 그보다 더 지겨운 것은, 같은 내용의 답을 몇 십 번씩, 몇 백 번씩, 심지어 몇 천 번씩이나 반복하는 것인데, 그렇다고 ‘나(我)’를 아는 방법을 가르친다면서 대답하지 않을 수도 없고.

그래서 아예, 여러 해 동안 ‘나는 누구지?’ 고민하는, ‘나를 알고 싶다’ 말하는 수 만 명의 사람들과 대화한 것들을 최대한 순화하여 질문의 유형별로 정리했다.

그것도 그저 평범하게 대화했던 것이 아니라, 심지어 자식 같은 연놈들에게까지 온갖 험악한 소리를 들어가면서 나누었던 대화 아닌 대화들까지 포함하여.

Q : 데카르트가 했다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말이 여러 사람들 사이에서 적지 않은 논란이 있는 듯싶더군요.

그렇다고 하더군요. 논리학적, 철학적 방법으로 쉽게 검증할 수 없다는 이유로 그러는 것 같은데, 그래서 아예 오류라고 단정하고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람들도 여럿 있다고 하네요. 또, 그 말을 ‘데카르트의 사유 제1법칙’이라고 가르치는 교수들도 있다고 하고요. 그래서 그렇게 알고 있는 대학생들도 많이 있어요.

Q : 그래요? 그렇다면 과연 어떤 사람의 말이 맞는 것일까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말은 ‘나’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얻게 되는 여러 가지 깨달음들 중의 하나입니다. 따라서 그 말은 데카르트만의 것이 아니라, 자신을 알기 위하여 노력하는 사람들 모두의 것이요, 자기관찰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얻을 수 있는 깨달음인데, 그러니 그중에서 맞는 말은 하나도 없죠.

Q : 그래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나이 많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20대 초반의 젊은이들 중에도 같은 사실을 깨닫고는 똑같은 말을 되뇌었던 사람들이 여럿 있어요.

Q : 그 정도의 나이에도 그런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요?

그럼요. 얼마나 일찍 자신을 알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느냐? 얼마나 자기관찰을 열심히 했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니까요. 물론, 그보다 더 수준 높은 사실을 깨달아 알게 된 젊은이들도 여럿 있습니다. 그중에는 그 목적을 이룬 사람들도 있고요.

Q : 그래요? 젊은 사람들이 참 대단하군요. 아무튼, 그래도 무슨 근거가 있으니 그 말이 오류니, ‘데카르트의 사유 제1법칙’이니 말하는 것 아닐까요?

아직 데카르트만큼도 자기관찰을 이루어지지 않은 까닭에 그렇게 자기네 마음대로 떠들어대는 것이죠. 즉, 자기네들 사고수준이 매우 낮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굳이 관심가질 필요는 없을 듯싶군요.

Q : 이런, 그렇게 함부로 무시해도 상관없을까요?

누구의 도움도 없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깨달음을 얻기까지는 엄청나게 많이 아파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엄청나게 많은 피눈물을 흘려야 하죠.

그런데 그 모든 것을 ‘오류’라고 단정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대우를 해줄까요?

Q : 그래도 베이컨 등의 경험론자들에게 비판을 받았다는 것은 데카르트에게 무엇인가 문제가 있다는 증거 아닐까요?

나는 철학에는 관심이 없다보니 베이컨이 데카르트의 어떤 점을 비판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또, 어떻게 비판했는지도 모르겠고요. 하지만 ‘나’는 어떤 단편적인 노력을 통해 알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래서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아무리 경험이 많아도 자기관찰을 하지 않으면 아이만큼도 자신에 대하여 모를 수 있죠.

Q : 음, 그런데요?

그렇다보니 실제로 나이가 80, 90이 된 노인들 중에도 겨우 데카르트가 말했던 정도의 깨달음도 얻지 못한 사람들이 수두룩한데, 경험을 중시했다는 베이컨이 그 한계를 넘어서 데카르트를 제대로 비판할 수 있었을까요? 물론, 부분적인 비판은 얼마든지 할 수도 있었겠지만, 총체적인 비판은 아예 불가능할 듯싶군요.

Q : 그렇다면 베이컨의 비판이 오히려 비판받아야한다는 뜻인가요?

내가 그 사람들에 대하여 자세히 모르니 더 이상의 자세한 이야기를 할 수는 없지만, 실제로 베이컨 등이 경험을 중시했다면, 그들의 데카르트에 대한 비판은 그저 ‘철부지 어린애들의 실수’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 가장 좋을 듯싶군요.

왜냐하면, 경험론은 자기관찰의 아주 초보적인 단계에서나 할 수 있는 이야기거든요.

Q : 음.

또, 칸트를 좋아한다는 사람들 중에도 데카르트에 대해서는 냉혹하게 대우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있던데, 그런 사람들 역시 ‘세상물정을 모르니 저런다’ 생각한 뒤, 그냥 무시하고 넘어가는 것이 가장 현명합니다.

Q : 아니, 그 사람들은 또 왜요?

두 사람이 각기 말했다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와 ‘물자체’를 근거로 하면, 데카르트가 칸트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 자신을 알기 위하여 노력했으며, 그 과정에서 훨씬 더 많은 고생을 했고, 또, 훨씬 더 많은 피눈물을 흘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칸트보다 데카르트가 더 대우를 받아야겠죠?

Q : 뭐, 푯말님의 말씀대로라면 그렇겠죠.

그런데 더 많이 고생하여 더 큰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몹시 천대하는 반면, 더 적게 고생하여 더 작은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귀하게 대우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그냥 ‘세상물정 모르는 철부지 어린아이’ 정도로 생각하고 넘어가는 것이 가장 현명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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