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我)’의 의미

2011. 8. 15. 19:57푯말의 대화

사람들이야 궁금하니 묻겠지만, 똑같은 질문을 몇 십 번씩, 몇 백 번씩, 심지어 몇 천 번씩 받으면 ‘참 지겹다’ 생각이 저절로 든다.

그런데 그보다 더 지겨운 것은, 같은 내용의 답을 몇 십 번씩, 몇 백 번씩, 심지어 몇 천 번씩이나 반복하는 것인데, 그렇다고 ‘나(我)’를 아는 방법을 가르친다면서 대답하지 않을 수도 없고.

그래서 아예, 여러 해 동안 ‘나는 누구지?’ 고민하는, ‘나를 알고 싶다’ 말하는 수 만 명의 사람들과 대화한 것들을 최대한 순화하여 질문의 유형별로 정리했다.

그것도 그저 평범하게 대화했던 것이 아니라, 심지어 자식 같은 연놈들에게까지 온갖 험악한 소리를 들어가면서 나누었던 대화 아닌 대화들까지 포함하여.

Q : 사람들 중에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고, 또, ‘나를 찾고 싶다’ 말하는 사람들도 있던데, 도대체 그 말의 뜻이 무엇인가요?

궁극적으로 말하면, 그 본래의 모습을 알고 싶고, 또, 회복하고 싶다는 뜻이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본래의 나(我)를 알고 싶다’라는 말이 될 것이고, 또, ‘본래의 나(我)를 회복하고 싶다’라는 말이 되겠죠.

Q : 그렇군요. 그런데 과연 ‘본래의 나’라는 것이 존재할까요?

찾아보면 알 수 있겠죠? 없다면 아무리 뒤져도 나오지 않겠지만, 있다면 언제인가 나올 것이니까요. 따라서 굳이 그 존재 여부를 따지기보다는, 있는지 없는지 알아보기 위해서라도 직접 찾아보는 것이 가장 현명할 듯싶군요.

Q :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것을 무조건 찾는다? 과연, 그런 태도를 현명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오히려 어리석은 행위라고 말하는 것이 정확하지 않나요?

지금은 옛날이야기가 되어버렸지만,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말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코페르니쿠스를 미친놈 취급했답니다. 그러다가 결국 코페르니쿠스를 불에 태워서 죽였는데, 만약 그때에 태어났다면 불에 타죽으면서도 끝내 그 주장을 굽히지 않은 코페르니쿠스를 편들겠습니까? 아니면, 그를 잔인하게 불에 태워서 죽였던 사람들의 편에 서겠습니까?

Q : 저야 당연히 제 주관대로 했겠죠.

실제로 지구가 도는지, 혹은, 그렇지 않은지조차 모르면서 어떻게 주관을 가질 수 있을까요? 아무 근거도 없이 어떻게 명확한 주관을 가질 수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무엇인가 근거가 있어야지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Q : 음.

수많은 사람들이 툭하면 ‘내가 보기에 이것은 없다’라고 말하고, 또, ‘내 생각에 저것은 있다’라고 말하지만,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있는 것이 사라지는 것은 결코 아니며, 또, 없는 것이 갑자기 나타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말하든지 상관없이, 있는 것은 계속해서 있고, 또, 없는 것은 계속해서 없죠.

Q : 당연히 그렇겠죠.

따라서 ‘내가 보기에 있다’, 혹은, ‘내 생각에 없다’라고 말하는 것은 결국 한낱 말장난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쓸데없이 그런 말장난에 몰두하느니보다는 차라리 직접 ‘본래의 나’가 있는지 없는지 찾아보는 것이 현명하다는 말이죠.

Q : 푯말님이 ‘나’를 찾는 방법을 가르치는 분이라고 해서 물어본 것인데요.

그렇다면 내가 ‘본래의 나는 있다’라고 말하면 그대로 믿겠습니까? 또, 없다고 말하면 그대로 믿겠습니까? 그건 아니겠죠? 내가 어떻게 말하든지 상관없이, 마치 설문조사하는 사람처럼 내 대답을 듣지 않겠어요? ‘이 사람은 이렇게 생각하는구나’라고 말입니다. 그보다 조금 더 나은 정도라면 참고사항으로나 생각하겠죠.

Q : 그렇겠죠. 푯말님의 말씀이 정확하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없으니까요.

그렇죠. 그런데 내 말이 100% 확실하다면 지금부터 ‘본래의 나’를 찾기 위하여 열심히 노력할 것 같습니까? 그것도 아닐 듯싶은데요. 공부를 잘하는 사람은 좋은 대우를 받는다는 사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모든 학생들이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은 아니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나야 그저 ‘찾아보면 안다’ 말할 뿐, 더더욱 ‘본래의 나’가 있는지 없는지 말할 필요가 없겠죠?

Q : 음.

더구나 이 세상에는 별 희한한 사람들이 다 있는 까닭에, 내가 대답을 조금만 잘못했다가는 쓸데없는 논쟁에 휘말려서 시간만 낭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느니 차라리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만, ‘나를 찾고 싶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만 그렇게 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려고 하는 것이죠.

Q : 그렇다면 그 나머지 사람들은 어떻게 하고요?

밥을 먹기 싫다고 도망 다니는 아이를 밥그릇을 들고 뒤쫓아 다니는 엄마처럼, 그런 사람들까지 나더러 모두 책임지라고요? 굳이 밥을 먹으라고 말하지 않아도, 배가 고프면 다가와서 밥을 달라고 말하는 아이처럼, 그런 사람들 역시 언제인가 때가 되면 먼저 찾아와서 ‘나를 찾는 방법을 가르쳐주십시오’ 말할 것인데, 내가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나는 그때까지 그저 기다리기만 하면 됩니다.

Q : 하긴, 푯말님이 답답할 것은 없을 테니까요.

그 때문인 것 같습니까? 그 본래의 모습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는 사람들에게 내가 먼저 가서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십시오’ 말하면 모두 그렇게 할 것 같아요? 혹시, 내가 장사꾼이나 사이비 종교인으로 오해받을 가능성이 더 높지 않을까요?

Q : 뭐, 그럴 수도 있겠군요.

괜히 먼저 덤볐다가는 제대로 말할 수 있는 기회조차 잃어버릴 수도 있답니다. 그러느니 차라리 기다리는 것이 낫죠. 기다리는 것이 최선의 공격일 때도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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