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8. 16. 12:13ㆍ푯말의 대화
그런데 그보다 더 지겨운 것은, 같은 내용의 답을 몇 십 번씩, 몇 백 번씩, 심지어 몇 천 번씩이나 반복하는 것인데, 그렇다고 ‘나(我)’를 아는 방법을 가르친다면서 대답하지 않을 수도 없고.
그래서 아예, 여러 해 동안 ‘나는 누구지?’ 고민하는, ‘나를 알고 싶다’ 말하는 수 만 명의 사람들과 대화한 것들을 최대한 순화하여 질문의 유형별로 정리했다.
그것도 그저 평범하게 대화했던 것이 아니라, 심지어 자식 같은 연놈들에게까지 온갖 험악한 소리를 들어가면서 나누었던 대화 아닌 대화들까지 포함하여.
Q : 과연, 사람들이 말하는 ‘본래의 나(我)’란 무엇일까요?
Q : ‘순수한 나’요?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순수하지 못하다는 뜻입니까?
따라서 ‘지금의 나’는 ‘억눌린 나’라고 이해해야 정확합니다.
Q : ‘억눌린 나’라?
그렇다보니 거의 모든 사람들은 들어갈 수 없을 만큼 작은 상자 속에 갇힌 것처럼, 삶 자체가 완전히 뒤바뀔 정도로 아주 심각하게 억눌려있어요.
그러니 삶이 고통스럽지 않을 수 있을까요? 과연 아무런 문제도 생기지 않을 수 있을까요? 결코 그럴 수 없죠.
Q : 문제라면 어떤 문제를 말씀하시나요?
또,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성격에 대한 고민도 그 문제들 중 하나이죠. 그뿐 아니라, 실제로는 고혈압이나 당뇨, 또, 암 등의 매우 다양한 질병들 역시 바로 억눌린 까닭에 시작되고요.
Q : 그래요?
Q :그래도 약을 먹거나 수술을 받은 뒤 병이 나은 사람들도 많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런 방법들을 사용하는 것이 문제가 있다고 말하면 안 될 것 같은데요.
억눌린 까닭에 생긴 문제들이 그런 단편적인 방법들로 모두 해결될 것 같습니까?
억눌린 까닭에 시작된 고통이 그런 단편적인 방법들로 모두 사라질 것 같습니까?
Q :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는데,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억눌릴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누구인가에게 억눌려서 자신의 원형, 즉, 그 본래의 모습도 전혀 모르면서 억눌려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니, 자신의 원형이 있다는 사실도 모르면서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는 없잖아요?
Q : 음.
Q : ‘본래의 나’를 알고 싶어 한다는 이유로 억눌립니까?
Q : 하긴, 저도 누구인가에게 그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이 있는 것 같군요.
Q : 뭐, 푯말님 말씀대로라면 그렇겠군요.
그중에는 심지어, 자기가 쉽게 이해하지 못할 말을 한다는 이유로 험악한 말을 쏟아 내거나, 주먹을 휘두르는 사람들까지 있고요.
Q : 그래요? 정말 별 희한한 사람들이 다 있군요.
그러면서 ‘내 속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 없다’라는 등으로 툴툴대고.
마치, 자기만이 그 본래의 모습을 알기 위하여 노력한다는 듯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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