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알면 1

2011. 8. 18. 22:40푯말의 대화

사람들이야 궁금하니 묻겠지만, 똑같은 질문을 몇 십 번씩, 몇 백 번씩, 심지어 몇 천 번씩 받으면 ‘참 지겹다’ 생각이 저절로 든다.

그런데 그보다 더 지겨운 것은, 같은 내용의 답을 몇 십 번씩, 몇 백 번씩, 심지어 몇 천 번씩이나 반복하는 것인데, 그렇다고 ‘나(我)’를 아는 방법을 가르친다면서 대답하지 않을 수도 없고.

그래서 아예, 여러 해 동안 ‘나는 누구지?’ 고민하는, ‘나를 알고 싶다’ 말하는 수 만 명의 사람들과 대화한 것들을 최대한 순화하여 질문의 유형별로 정리했다.

그것도 그저 평범하게 대화했던 것이 아니라, 심지어 자식 같은 연놈들에게까지 온갖 험악한 소리를 들어가면서 나누었던 대화 아닌 대화들까지 포함하여.

Q : ‘나’를 알면 좋은가요?

‘나’를 알면 좋으냐? 참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군요. 그렇게 된다고 해서 마냥 좋은 것도 아니고, 마냥 나쁜 것도 아니니, 어떻게 대답해야할지 모르겠어요.

Q : 그래요? 그럼 좋은 점은 어떤 것이고, 나쁜 점은 어떤 것인가요?

무엇인가 오해를 하시는 듯싶은데, ‘나’라는 존재는, 그리고 사람이라는 존재는 그렇게 단편적으로 말할 수 있을 만큼 단순하지 않답니다. 그렇다보니 ‘나’를 알게 되면 어떤 것이 좋으며, 또, 어떤 것이 나쁜지 단편적으로 말할 수도 없어요. 말로 그 모두를 소개하려면 아마 평생이 걸려도 다 못할 듯싶군요.

Q : 그 정도에요? 그렇다면 그중에서 가장 좋은 점은 뭐라고 생각하세요?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되고, 왜 사는지도 알게 되며, 또, 어떻게 살아야할지도 알게 되니, 그런 것이 가장 좋다고 말할 수 있겠군요. 더 이상 그에 대한 고민은 하지 않을 것이니까요. 그 밖의 가장 좋은 점은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군요.

Q : 네에. 그럼 가장 안 좋은 점은 뭐라고 생각하세요?

아무래도 좀 더 원론적으로 대답해야할 것 같군요. 무엇이든지 제대로 감당할 수만 있다면 그만큼 좋은 것이지만, 온전하게 감당할 수 없다면 그만큼 좋지 않은 것입니다. 따라서 감당하기 어려운 것들 중에서 가장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 가장 좋지 않다고 이해하면 되겠군요. 물론, ‘나’를 알게 된 뒤에도 마찬가지이고요.

Q : 그럼 가장 감당하기 힘든 것은 무엇인데요?

그야 사람마다 다르죠.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외모를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학벌이나 학력 등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며, 또, 그 밖의 다른 무엇인가를 온전하게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으니까요.

Q : 그래도 사람들이 가장 감당하기 힘들다고 말하는 것이 있을 것 아니에요?

안타깝게도, 내가 아직 그런 것까지 모두 조사하지는 않았답니다. 또, 실제로는 모두 조사할 수도 없고요. 내가 자신을 알게 된 모든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요? 그래서 그저 원론적으로만 대답한 것입니다.

Q : 그럼 푯말님이 아는 사람들은 어떤 것을 가장 감당하기 힘들다고 생각하는지 말씀해주실 수 있죠?

그야 곤란하죠. 내가 알고 있다고 해도. 어떻게 남의 개인적인 사정을 말해줄 수 있겠어요? 그렇게 궁금하면 본인들한테 가서 직접 물어보는 것이 좋겠군요.

이번에는 내가 질문을 하나 하죠. 도대체 왜 그렇게 꼬치꼬치 캐묻는 거죠?

Q : ‘나’를 알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야, 또, 그렇게 되면 좋은 점은 무엇이고, 나쁜 점은 무엇인지 알아야 ‘나’를 알기 위하여 노력할 것 아닌가요? 만약, ‘나’를 알고 나서 나쁘게 된다면 굳이 그런 노력을 할 필요가 없잖아요?

물론, 그렇기야 하죠. 그런데 내가 언제 자신을 알기 위하여 노력하라고 말했나요? 아니면, 다른 누구인가 자신을 알기 위하여 노력하라고 말했나요?

Q : 아뇨, 그런 말 들은 적 없는데요.

그런데 왜 그런 생각을 하죠? 말하는 것을 보아하니, ‘반드시 나를 알아야겠다’ 생각하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왜 자신을 알게 된 뒤를 그렇게 알고 싶어 하죠?

Q: 알아두면 좋잖아요. 언제인가 저도 ‘나를 알고 싶다’ 생각하게 될 수도 있고요.

그때를 대비해서 미리 알아두는 것이다? 그렇군요. 그럼 질문을 하나 더 하죠.

어떤 사람이 자기의 나이 어린 아들에게 ‘이것만 있으면 너는 평생 동안 잘 살 수 있다’ 말하면서 그 아이의 등에 1톤짜리 금덩이를 올려줬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렇다면 과연 그 어린아이는 평생 동안 잘 살 수 있을까요?

Q : 1m도 못 가서 그 금덩이에 깔려죽지 않을까요? 그렇게 될 것 같은데.

아무래도 그렇게 되겠죠? 그와 마찬가지로, 비록 ‘나’를 알게 되었다고 해도 ‘본래의 나’를 온전하게 감당할 수 있다면 그만큼 좋아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와는 달리, ‘본래의 나’를 제대로 감당하지 못한다면 그만큼 고통스러워하게 되겠죠.

Q : 음. 그러면 ‘나를 알고 싶다’ 말하는 사람들은 다 ‘본래의 나’를 감당할 수 있는 까닭에 그렇게 말하는 것인가요?

‘나’를 감당하는 능력은 ‘나’를 알게 되는 만큼 커집니다. 또, 얼마나 감당하기 위하여 노력하느냐에 따라서 그 능력은 더욱 커지죠. 그렇다보니 그저 ‘나를 알고 싶다’ 말하는 사람들이 자신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자신을 알기 위하여 노력하는 사람들만이 그만큼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Q : 그럼 지금 저는 얼마나 ‘본래의 나’를 감당할 수 있을까요?

아직 자신을 알기 위한 노력을 시작하지도 않았다면 당연히 조금도 감당하지 못하겠죠. 만약, 이제까지 1%의 노력을 했다면 당연히 자신을 1%까지 감당할 수 있을 것이고요. 이를 바꾸어 말하면, 99%의 ‘나’는 감당할 수 없다는 말도 되는데, 따라서 99%만큼은 자신에 대하여 거부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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